《추상 抽象 Abstraction》
김시습
이미지가 쏟아진다. 오늘날 이미지와 관련하여 어떤 소외가 발생한다면 그것은 근본적으로 생산수단의 소유와 연관된 것이라기보다는 이미지를 소비하는 방식과 관련하여 발생하는 소외다. 요즘 사람들은 이미지가 너무 많아서 소외된다. 우리에겐 어떤 대상을 온전하게 보고 경험할 틈이 주어지지 않는다. 무언가를 보기 이전에 그것을 카메라에 담고 SNS에 올려야 한다. 타임라인에 올라온 이 이미지들은 시간과 함께 앞으로 나아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동시에 새로운 이미지가 먼저 있었던 이미지를 뒤로 밀어내면서 거꾸로 넘쳐 흘러내리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이러한 현상은 그 자체로 크게 개탄할 만한 일은 아니다. 이것이 우리 시대의 의사소통 방식이니 말이다. 진짜 문제는 쏟아진 이미지들이 향하는 방향이다. 무질서하게 쏟아지는 것으로만 보였던 이미지들이 실상은 때때로 기존의 질서를 답습하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면 어떨까? 이미지를 주워 담는 것은 이제 소수의 권력자들이 아니다. 그들은 어딘가에서 흐뭇해하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당장에 이 이미지들이 향하는 곳은 ‘댓글지옥’으로 대변되는 혐오의 수렁이다. 무의미한 세계에 의미를 불어넣기 위해 끊임없이 희생양을 찾는다는 점에서 이곳은 바닥으로 내려와 표층화된 종교의 세계를 이룬다. 조르조 아감벤(Giorgio Agamben)은 이처럼 위치만 바꾼 권력의 작용을 환속화(secolarizzazione)라는 비판적인 말로 규정했다. 이곳에서 이미지는 ‘-녀’, ‘-충’ 등의 단어나 여러 종류의 음모론, 또는 ‘기-승-전-메갈’의 서사와 같은 환속적 언어로 수렴된다.
오프라인이라고 해서 상황은 별반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여기서는 광장의 민주적 이미지가 같은 방향으로 흐르는 역설을 보게 된다. “암탉”이나 “미스박”과 같이 촛불시민들 사이에서 발견되는 환속적 이미지들. 이들이 환속적인 까닭은 탄핵당한 대통령의 실질적 과오 대신에 그의 여성성을 비아냥의 대상으로 삼기 때문이다. 탄핵의 성과는 온전히 평가받아야 마땅하지만, 그래서 이들은 더욱 난감하다. 태극기 부대의 시대착오적 이미지는 매우 가까이에서가 아니라면 공포스럽기보다는 희극적으로 느껴진다. 때론 심지어 애잔하기까지 하다. 그러나 촛불시민의 시대착오에 대해서는 거리를 만들어내기조차 어렵다.
《추상(抽象, abstraction)》은 이러한 이미지 과잉의 시대 ‘헬조선’에 대한 반응으로서 기획되었다. 환속의 언어를 향해 치닫는 이미지 폭포의 물길을 잠시 막고, 이미지가 이미지 자체로 남을 수 있는 시공간을 제공해보면 어떨까? 한데 모인 이미지들이 우물을 만들면 그것은 그 자체로 풍경이 되는 동시에 그 반대편의 풍경 또한 거울처럼 비추게 되지 않을까?
《추상》이라는 이 전시의 제목은 이처럼 환속의 흐름으로부터 이미지를 떼어놓는 행위나 작용을 의미한다. 이는 구체화(具體化)나 재현(再現)의 반대말로 쓰이는 이 용어의 일반적인 쓰임을 다소 비튼 것이다. 추상을 뜻하는 한자어의 맨 앞글자인 ‘抽’와 영어의 접두사인 ‘ab-’은 동일하게 추출하거나 떼어낸다는 뜻을 가진다. 고로 추상이란 말에는 특정 이미지로부터 필요한 이미지를 떼어내는 행위나 작용이라는 뜻이 새겨져 있다.
이러한 질문과 이름 앞으로 권세정, 김웅용, 임영주, 최윤 이렇게 네 명의 작가가 불리었다. 파운드 푸티지와 파운드 오브제를 적극 활용하는 이들의 작업에서 이미지는 종래의 쓰임으로부터 분리되어 이곳 합정지구에 낯설게 그리고 유머러스하게, 또 조금은 을씨년스럽게 제시된다. 철모르는 아이들의 놀이인 동시에 절박하게 내미는 중단의 손짓이기도 한 이들의 행위가 낙인과 혐오로 점철된 오늘날 이미지 사용법의 기원과 구조를 어렴풋하게나마 비추기를 기대한다.
파도에 쓸려온 얇은 비너스 – 최윤
최윤은 일상에서 흔히 발견되는 통속적인 이미지를 영상 및 설치를 활용한 작품 속에서 의도적으로 생경하고 조야하게 편집함으로써 이미지의 상투적 쓰임에 관하여 흥미롭고 다양한 질문을 던져왔다. 이번 전시에서 이러한 관심은 공공장소에 사물들이 걸려 있는 풍경을 흉내 내는 방식으로 이어진다.
<비너스의 탄생>(2013/2017)과 <1-30-1-30: 안으로 굽은 팔과 핸드폰 살리기>(2017), <전시달력 #9(20170901-20170930)>(2017) 그리고 <창문그림액자 F타입: 끝없이 펼쳐진 들판과 전시 리모컨>(2017)이 버스터미널의 대합실이나 식당 혹은 사무실과 같은 곳에 TV, 달력, 그림 등이 걸려 있는 모습처럼 제시된다. 최윤의 이와 같은 패러디는 그것이 실상 이중적 패러디라는 점에서 흥미롭고 비평적인 효과를 발생시킨다. 그의 작품을 보다보면 그가 흉내 내고 있는 대상들 자체가 이미 고전의 미적 대상이나 태도를 흉내 내고 있다는 느낌을 받게 되는데, 이로써 낯설어지는 것은 이제 일상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의 머릿속에 오랫동안 존재해온 그 고전적인 관념들이다.
우주에서 온 불투명한 메시지 – 임영주
임영주는 종교나 무속신앙의 믿음 또는 그보다 더 일상적이고 사소한 차원의 통속적 믿음의 구조를 작품을 통해 탐구해왔다. 전시작인 <총총>(2017)은 영상에 있어 믿음을 발생시키는 데에 쓰이는 매우 작은 단위의 효과들이나 그와 유사한 형태의 영상 이미지들을 수집하여 편집한 작업이다. 대중 애니메이션에서 이목을 집중시키기 위해 쓰이는 이미지와 사운드를 비롯하여 작가의 초등학교 담임 선생님이 수업 시작 전에 시켰던 명상을 수행하는 소리에 이르기까지 그 종류는 다양하다.
원래의 맥락에서는 제대로 기능했을 이 유닛들은 임영주가 새롭게 제시한 맥락 내에서 작동과 오작동을 오가며 반복한다.이 중 가장 흥미로운 것은 작품 전반을 끌고 가는 모티프로서 우주로부터 되돌려 받는 어떤 신호에 관한 영상들이다. 예를 들어 영상의 도입부와 후반부에는 과거에 쏘아 보냈던 탐사선이 스페이스 데브리스(space debris)가 되었다가 우연히 대기권을 다시 통과해 운석과 같이 떨어지는 이미지가 나타난다. 또한 중간 중간 보이는 노이즈가 많은 이미지는 그 추락하는 탐사선에서 촬영된 것이다.
외계의 응답인지 아니면 그저 무의미한 흔적에 불과한 것인지 모를 이 애매한 기호들은 단지 우주와 연관된 메시지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소통의 근본적 불투명성에 관한 알레고리인 것처럼 느껴진다.
엄마라는 거울 – 권세정
권세정은 인터넷이나 TV 등에서 가깝게 접하게 되는 이미지와 그것이 오늘날 소비되는 형태를 미술 작품 내에서 적절하게 재현하는 방식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이번 전시작인 <언커버리얼리티¼>(2017)은 서로 상반된 종류의 두 이미지가 각각 윈도우 바탕화면과 화면보호기를 통해 재생되도록 설치한 작품이다.
전시장에 설치된 컴퓨터의 바탕화면에는 마이크로소프트에서 제공하는 통속적인 자연 풍경 사진이 깔려있는 것과 반대로, 화면보호기에는 작가가 웹상에서 우연히 발견한 <그것이 알고 싶다>의 미제 사건 피해자 여성의 사진을 가공하여 만들어낸 이미지 조각들이 부유하고 있다. 같은 화면 안에서 재현되지만 동시에 재생될 수는 없는 두 종류의 상반된 이미지는 인터넷 상에서 이미지가 소비되고 유통되는 방식의 일면을 은유적으로 드러내 보여주는 것 같다.
한편 <우먼 인 더 미러>(2017)는 딸과 엄마의 대화를 그로테스크하게 느껴질 정도로 낯설게 가공한 영상으로서 가부장제 내에 안착하지 못하면서 동시에 그곳을 떠나지도 못하는 여성의 위태로운 모습을 재현하고 있다.
지나간 종말과 미래 – 김웅용
김웅용은 고전영화나 보도영상 등에서 추출한 파운드 푸티지나 음성을 자신이 연출한 영상과 조합하여 편집함으로써 어딘가 불길하고 기묘한 느낌의 영상을 제작하여 선보여 왔다. 이번 전시의 (2017)에서 그는 1992년에 남한 사회를 떠들썩하게 했던 이른바 “휴거사태”에 주목한다.
이는 다미선교회를 중심으로 몇몇 종교단체가 퍼뜨린 시한부 종말론과 그를 둘러싼 사회적 소동으로, 이 영상은 김웅용이 지속해온 기존 영상의 제작방식대로 휴거사태 주변의 파운드 푸티지와 그가 연출한 영상을 결합하여 만들어졌다. 그런데 여기에는 1968년에 개봉한 SF영화인 <2001 스페이스 오딧세이>가 또 하나의 모티프로서 함께 결합되어 있다.
이미지보다는 사운드가 주로 차용되었으며 완성 직전에 배제되었다고 알려진 나레이션이 구글 번역기로 어색하게 번역되어 나레이터의 음성을 통해 나오고 있다. 그리하여 영상은 이제는 모두 과거가 되어버린 종말과 미래에 관한 상상을 아이러니하게 연결하여 제시한다.
관련 보도
2017. 9. 17, 한겨레 "이미지 홍수 시대 젊은 작가들이 떼어낸 ‘추상’"
2017. 11월, 미술세계 "[리뷰] 이미지 훼손과 미신의 연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