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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현시원_임영주의 ‘수련’, ‘에너지 모양Seewon Hyun Youngzoo Im's Training and the Shape of Energy

임영주의 ‘수련’, ‘에너지 모양

현시원
 

작가 임영주의 책 『인간과 나』(2021)는 손에 쏙 들어오는 책이다. 이 책을 손에 들고 지하철을 타고 9번 마을버스를 타고 인왕산 앞에 도착했다. 그리고 효창공원 역으로 가는 1711번 버스를 타고 창문을 24회 정도 쳐다봤다. 그리고 도착한 카페의 이름은 ‘미래(未來)’. 미래라는 카페의 맞은편은 공용 주차장이 있다. 이 카페 안에서 작가는 내가 손에 들고 있는 책을 바라본다. 그는 “각주를 하나의 구멍”으로 보았던 경험을 말해준다. 경험이라는 것은 무엇일까? 큰 질문을 하는 여자들은 거대한 뿌리와 싸운다. 이 거대한 뿌리는 살림, 부엌, 손전등, 식탁 위에서 글쓰기, 앞면과 뒷면이 다른 출처없는 주장들, 순식간에 얼굴표정을 바꾸는 사람들의 장면들과 만난다. 임영주는 경험과 신비를 동시에 다룬다. ‘동시에 다룬다’는 말을 나는 종종 쓴다. 하지만 지금(2023년 여름, 겨을)의 작가가 VR 을 다룬다고 말할 때 나는 그것이 동시대 정부가 말하는 ‘먹거리’(미래 직업, 경제, 생산의 데이터)와 다른 ‘불신’의 문제임을 생각한다. 그가 만든 영상을 지켜보자니, 어딘가에서 멀리 들려오는 가까운 메아리들이 사운드로 존재한다. 작가의 내레이션으로 사심없이 내뱉는 말들은 모두 예언적이다. 그러나 내일의 날씨를 말하거나((2017), ‘슈퍼(super)’라는 뜬금없는 구호를 낯게 외칠 때, 어떤 종교적인 명상과 우스갯소리치고는 반복되는 처연함이 뒷목을 긴장하게 만든다. 지금(2023년 여름) 작가는 VR과 공간의 이동 문제를 명상, 요가와 연관시킨다. 모두 다 신체의 움직임과 연관되어 있고, ‘잠시 멈춤’의 순간과 관계있다. 아직 채 작업으로 완성되기 이전 시점에서 임영주는 그가 탐구하고 있는 VR이라는 매체와 관련해 ‘몰입과 각성’ 두 사이의 이동을 주요하게 언급했다. VR은 머리에 딱 들어맞는 장치 없이는 작동하지 않는다. 사실 그 눈가리개 사이로, 눈과 코 사이로 희미하게 보이는 착지가능한 땅은 이 VR이 보여주는 신기술의 과거의 ‘마술사’들의 눈속임과 크게 다를 바 없음을 증명한다. VR은 신체와 물질성, 꿈의 시공간을 돌고 돌아 사실상 제작자와 관람자 사이의 ‘그래 믿어주기로 하자’는 사이비 신뢰에 기반하고 있는 것이다. 임영주에게 VR은 하나의 태도다. 직접 그 우스꽝스러운 사물을 뒤집어쓰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 침묵과 어둠의 세계에 대한 통찰이다. 동시대 예술과 테크놀로지, 소위 융복합(컨버전스)를 다루는 예술의 만연함 앞에서 임영주는 다른 방향으로 간다. 이 독립적인 보행의 방식은 작가가 VR을 ‘명상 컨텐츠’와 유사하다고 바라보는 데에 기저한다. 즉 그에게 기술은 누군가에게, 실제 생활에, 어떤 조직에 ‘도움’이 되기보다는 “헛것의 장치”(작가의 말)로서 존재하는 새로운 물성이다. 작가가 초기 작업에서부터 다루어왔던 물질, 믿음, 바라보는 시점의 문제는 지금까지도 지속적으로 목소리를 내고 지도를 그리고 있다. 실로 임영주의 작업과 사고 방식은, 오늘날 아트앤테크놀로지에서 무비판적, 무성찰적으로 논의되는 미래상에 대한 재고찰이자 보다 미래적인 제언으로 여겨지는 것이며, 실제로 그렇다. 2) 내가 손에 들고 있던 것이 하나의 책이었다면, (2021)는 책이자 스크리닝, 웹사이트, 그리고 퍼포먼스이기도 하다. 작가의 작업 문서에 적혀있는 이 캡션을 보면서, 관객들의 뒷모습이 있는 ‘등’을 본다. 즉 전시 사진으로 작가가 의 캡션과 함께 위치시킨 사진은 공간 전체가 보이는 이미지, 그리고 관객들이 듬성듬성 앉아있는 뒷모습이다. 그러므로 이 장면은 관객의 정면을 향한 눈보다도 바닥에 앉은 관객의 ‘등’이 어울린다. 이 관객들 안에 내가 있었더라면 나는 나를 발견할 수 있었을까. 관객들이 임영주 작가의 작업을 보고 있는 것인지, 단일한 작품을 보는 것인지, 이 까맣고 하얀 회색의 탁한 스크린 공간 앞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있는 것인지 정확하지 않다. 어쩌면 모두 다이다. 임영주의 작업에서 ‘각주’와 ‘구멍’ 그리고 ‘페이지’는 하나의 접힌(접혀진) 영토다. 거대한 영토를 육성으로, 육체적으로 갖기 위한 싸움이 아니다. 사과 껍질처럼 칼로 깍으면서 형태를 만들어가는, 나는 지금 김혜순의 시를 15년 만에 생각한다. 대학교 2학년 때 김혜순 시인의 시 수업을 들었고 우리는, 묘사하는 글쓰기가 가진 어려움에 대해 생각했다. 어쩌면 나 혼자 생각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설명하지 않으며 이렇게 쓰는 것. 김혜순 시인이 쓴 ‘잘 익은 사과’의 한 구절은 이렇다. “둥글게 둥글게 길을 깎아내고 있어요 /그럴 때마다 나 돌아온 고향 마을만큼/큰 사과가 소리없이 깎이고 있네요./ 구멍가게 노망든 할머니가 평상에 앉아/ 그렇게 큰 사과를 숟가락으로 파내서/ 잇몸으로 오물오물 잘도 잡수시네요”. 작가의 영상 작업인 (2021), (2021), (2017), (2018) 등을 다시 보자. 작가가 한 권의 책을 만들며 모았던 이미지, 문장, 실제 사건 등의 아카이브는 모두 ‘형식적으로 접힌 구조’와 관계있다. 과거의 구체적인 각주이며 고유한 형식으로서의 예언이다. (2017) 영상 크레딧에 ‘탄핵 선고 직후 광장소리(부부젤라소리), 한국디지털영상자료원의 강강수월래, 날씨 위젯 시뮬레이션 등이 등장하는 것을 보라. VR이 아니라 이걸 보는 사람들의 등이 현실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