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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몸이 없는 목소리, 아웃 사이트Frequency of Magic, OUT SIGHT

Frequency of Magic

기획: 임진호(out_sight)
참여작가: 박웅규, 임영주, 전지인, 사라 더피, 루스 워터스
오프닝 리셉션: 2019. 4. 18 (목) 오후 6시
전시기간: 2019. 4. 18 - 5. 19
관람시간: 화 - 일 12:00 ~ 6:00pm / 월, 공휴일 휴관
그래픽 디자인: downLeit / 박재영, 차지연

Curated by Jinho Lim(out_sight)
Artists: Wunggyu Park, Youngzoo IM, Jiin Juen, Sarah Duffy, Ruth Waters
Opening reception: 6pm, Thursday 18 April 2019
Date: 18 April - 19 May 2019
Hours: Tue - Sun 12:00 ~ 6:00pm / Closed on Every Monday & holidays.
Graphic Design: downLeit / Jaeyoung Park, Jiyoun Cha

 

 

Frequency of Magic : 몸이 없는 목소리

글 임진호

 

 

‘나는 하나의 목소리를 갖고 태어난다’는 ‘나는 성대와 입술과 혓바닥을 갖고 태어난다’와 달리 쉽게 수긍되는 말이 아니다. 종종 목소리는 힘겹게 쟁취해야 할 대상이며, 목소리를 빼앗기거나 포기해 버리고 마는 일 또한 역사 속에서 쉬이 목격 되기도 한다. 흔히 말하여지는 생애의 서사를 따르자면, 유아는 어머니의 목소리를 모사하고 아버지의 목소리에 순응 하면서 몸 안밖의 소음들로부터 쓸모있는 신호를 구별 해 낼 수 있게 된다. 또 아마도 학창시절, 가정의 울타리 밖에서 마주하는 규범들 앞에 용인되지 않는 욕망들의 볼륨을 줄여버리면서 정제된 목소리의 주인으로서 다듬어질 것이다. 사회 속의 나는 공동의 언어로 번역된 경험을 타인과 공유하는 과정에서, 하나의 목소리에 존재를 동기화시킬 수 있을 뿐이다.

타인의 경험으로 번역될 수 있는 언어로 말해야 한다는 강박은 동시에 타인의 언어에 존재를 구속시키는 장치로서 작동하는데, 지배적인 목소리의 일부로서의 개인은 정상성의 규범 바깥의 것들을 배제하는 장치에 동화되기 때문이다.¹ 이런 저런 관계들 속의, 그리고 시공간에 흩어져 있는 경험과 기억들 속의 존재를 두루 포섭하는 하나의 목소리, 몸의 주인이 되라는 강령에 떠밀려 우리는 의미있는 신호로 등록될 수 없는 피부 안밖의 소음들을 애써 외면한다 (“기능 향상에 도움이 되지 않는 충동은 억누를 것”). 아니, 우리는 형언할 수 없는(ineffable) 것들을 끝내 언어화하는 큰 목소리의 일부로서 가능성의 영역을 확장시키는 기획에 동원된다 (“하루를 마감하며 그날의 기쁨, 슬픔, 후회를 반추하여 아직 오지 않은 내일에 대한 기획과 함께 일기로 작성할 것”).²

떠들게 하는 것은 그 거대한 목소리가 스스로를 증식시켜 온 전형적인 수법인데, 푸코가 고증한 바 대로 진찰실과 상담실, 고해성사실 안에서 쉴새 없이 말하는 목소리에 의해 ‘존재당한’ 그 이름 없던 섹슈얼리티의 사례를 생각할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은 이제 어떤 활동도, 관계도, 흐름도 등한시 하지 않으며, 모든 경험으로부터 설명할 수 없는 그림자를 지워버릴 듯한 기세로 네트워크 상의 흔적, 이동 경로, 진료 기록, 상담 내역, 친구 관계, ♥ 등의 언어로 모든 것에 대해 쉴새 없이 떠들도록 장려한다. 이 안에서 긍정의 힘과 자율 감각 쾌락 반응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는 우리는, 이름 없던 것들의 이름을 만들어 내며 권력을 확장하는 큰 목소리의 일부로서 나의 모든 것을 발화하여 시스템에 사본을 남긴다.

유례 없이 빠른 속도로 패턴의 일부로서 수용되어지는 우리는 미디어의 안밖에서 몸을 경유하지 않는 경험을, 기억을, 관계를 이야기 할 수 있게 되었으며 몸에 축적되어 있던 감각들을 연쇄적으로 촉발시키는 신호 만으로도 사랑을 하고, 욕망 하고, 신뢰 하며, 약속에 희망을 걸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그 거울상 처럼, 물증 없는 경험과 기억과 관계를 이야기하는 몸 없는 목소리들이 수치심, 혐오, 불안과 희망을 선동하는 장치의 일부로서 통계학적 믿음과 몸에 대한 권력을 증산하는 것 또한 목격하고 있다.³ 우리는 어쩌면 이렇게 빠른 속도로 확산되는 몸 없는 목소리들과 함께 살아가기 위해, 아니 우리 스스로 몸 없는 목소리의 일부로서 살아가기 위해 주어지는 현실에 대해 더 많이, 더 명료하게 말하도록 훈련되고 있는지 모르겠다.

그 결과, 존재를 배신하지 않을 것이라 여겨졌던 목소리는 이제 몸을 떠나 다른 곳에 깃들어 쉬이 나를 가장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것으로 보인다. 목소리는 더이상 몸을 담보로 하지 않으며 (불쾌할만큼 허접한 인간형 껍질을 뒤집어쓴 로봇 소피아가 기자들과 농담을 주고 받는 것을 보라) 우리는 더이상 몸과 마음의 주인으로서 목소리를 점유하지 못하게 될까 두려워한다 (네트워크 상에 남은 망자의 데이터가 그의 기억, 취향, 말투로 복원되어 그 목소리를 소환한 유족의 욕망에 따라 살아가게 되는 대중 문화의 상상을 기억해 보자 (블랙미러 시즌2 1화 ‹돌아올게›).

그러나 사실 정확히 말하자면, 목소리는 한번도, 어디에도, 깃들어 있었던 적 없었던 것 같다. 목소리는 언제나 주어진 육체를 초월하여 더 고귀한 것에 깃들고자 했을 뿐이다. 나는 내 목소리의 온전한 주인인 적 없었고, 차라리 나의 입을 빌려 말하는 어느 복화술사의 무릎에 앉은 인형에 가까울지 모른다.⁴ 나는 그렇게 나로 하여금 말하게 하는 언어를 발화 함으로써 존재의 한계를 벗어나 더 큰 목소리의 일부가 된다. 나의 살과 의지의 울림이라고 믿어졌던 목소리는 나의 몸을 떠나, 번역하고 기록하고 재배치하여 위조, 재생산 할 수 있는 기호로서 외재(outdwell)하며; 우리는 다시 그 목소리를 내면화 함으로써 시스템에 동기화 될 수 있는 하나의 목소리가 되어 몸과 세상의 주인이 되리라는 환상을 갖고 살아간다.⁵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몸과 마음은 이곳 저곳에서 떠들며 하나의 일관된 목소리의 흐름을 교란시킨다. 내가 목소리의 주인인 적 없었던 것 만큼 목소리 또한 존재를 온전히 독재 하지는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⁶

 

¹ 예컨대,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는 발화는 너의 암탉, 그의 암탉, 어느 하나의 암탉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지만; 학습되어 무한히 복제되는 과정에서 내면화되어야 할 모든 암탉들에 대한 규범을 지시한다. 여성에 대한 여러 언어권의 속담들을 ‘너’에 대한 서술로 중성화하여 은경 위에 새겨 놓은 전지인의 ‹Folder: 직박구리› 앞에 서면, 텍스트를 읽고 발화하는 나의 목소리와, 은경 속 나의 이미지, 그리고 텍스트가 호명하는 ‘너’ 사이의 간격이 소멸 되는 경험을 할 수 있는데; 이때 불투명한 비유로서 긍정과 부정 어느 쪽으로도 고정되지 않던 그 언어 규범이 실은 어떤 대상도 붙잡을 수 없는 벌거벗은 목소리에 불과할 뿐임이 드러난다.

² 루스 워터스의 영상 ‹Emotion Over Raisin›은 지금 여기에 있는 몸의 감각에 모든 목소리를 집중시키는 훈련을 통해 몸과 마음의 일치라는 기능의 향상을 도모하는 어느 명상 교실을 보여준다. 건포도를 만지고 들여다보고 냄새 맡고 맛보는데 의식을 집중하려 할 때에도, 성공에 대한 강박,고양이, 보다 만 드라마와 인스타그램에 대해 우발적으로 말하는 목소리들이 둘러 앉은 이들의 명상을 방해한다. 몸과 마음의 완벽한 통제를 권하는 정보가 범람하는 현실은 역설적으로 몸과 정확하게 동기화된 하나의 목소리의 불가능성을 드러낸다.

³ 임영주의 영상 ‹Mood›는 스마트폰을 울리는 긴급재난문자의 사이렌 소리가 빗소리, 누런 하늘, 폭염을 배경으로하는 개별적 경험들을 납작한 불안의 정서로 환원시키며 재난의 기호에 집단의 기억을 수렴시켜버리는 근래의 현상을 조명한다. 한편 경고음과 유사하게, 드라마의 곳곳에 깔리는 긴박한 멜로디, 가빠지는 숨소리, 벌렁거리는 콧구멍, 희번덕이는 동공들은 언어적 서사를 경유하지 않는 기계화된 자율신경반응의 기호들로 우리의 반응을 훈련 시키는데, 이 정동의 장치들은 문화상품의 전략으로서 미디어의 곳곳에 포진하여 입력값에 대한 적절한 반응을 보이는 소비자를 양산해 왔다 (임영주 ‹분명 뭔가 있는데 말이지›).

⁴ 문을 열고 들어서면 머리 위에는 전시장을 내려다 보는 사라 더피의 얼굴이 있고, 입을 열지 않고 노래하는 그녀의 목소리가 공간을 가득 채운다. 복화술을 수행하는 그녀의 몸은 목소리로부터 거리를 두며, 몸 밖에서 도래하는 신의 목소리를 울리는 예언자처럼 몸으로부터 터져 나오는 목소리를 완전한 유령으로 승화시킨다 (‹Come On In›). 한편 옆 방에서는 무대 위에 선 사라 더피가 몸이 얼어붙어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었던 기억 속의 에피소드들을 이야기 한다 (‹Graceless›). 작동 정지해 버린 쓸모 없는 통제불능의 몸뚱이와 단호하게 선을 긋는 고상한 그녀의 목소리가 그것과 자기를 분리시키면 안되겠느냐고 집요하게 물을 때, 더피의 몸은 립싱크를 멈추고는 목소리를 버려둔 채 무대에서 걸어내려온다. 버림받아 초라하게 울리는 작가의 목소리는 또 다른 어떤 유령의 이미지로 허공을 맴돈다.

⁵ 불현듯 빈 벽으로 날아드는 임영주의 영상 메시지들은 언젠가 어디에선가 메시지를 보고 있을 그 누군가에게, 이렇게도 읽히고 저렇게도 읽히지만 어찌 받아들여지든 상관 없을 기호로서 던져 지는데 (메시지 속에서 와!는 와~이기도 하지만 와!! 이거나 와^^ 여도 상관 없다 (‹영상 메시지: 당신의 반대편›)), 언제 어디에선가 작가의 입을 떠난 목소리는 어떤 개별적인 것에도 달라붙지 않고 (기준 없이 돌아가는 하늘의 방위를 말하는 목소리는 참으로도, 거짓으로도 수렴되기 어렵다 (‹영상 메시지: 서남북동›) 유령처럼 기호에서 기호로 흘러가며 (하나 둘 셋, 둘 둘 셋은 1번 마, 2번 마, 3번 마로; 돌고 돌아 들어오는 첫번째, 두번째, 세번째는 인생의 회전 목마로 (‹영상 메시지: 왈츠 타임›)) 몸에 담아둘 수 없는 목소리의 휘발을 보여준다.

⁶ 몸 밖에서 혹은 안에서 몸을 공격하는 어떤 것으로 원인을 특정지을 수 없는 병변이 있다. 병인은 몸 자체인데, 이런 경우 몸의 주인으로써는 자기를 공격하는 스스로의 몸을 아(我)로도 타(他)로도 분류할 수 없다. 이 정체를 특정지을 수 없는 것(atopos)은 아토피다. 종이의 피부 위에 경면주사로 병변을 쌓아올리는 박웅규는 그 인과관계를 예측할 수 없다고 여겨지던 몸의 현상을 매체로 택하여 몸의 어떤 주술적 발화를 가장한다 (‹흉› 연작). 읽을 수 없는 만달라의 형태로 제단을 이루고 있는 이 흉의 부적 앞에는, 기이한 도상의 시체가 관 위에 수의처럼 눕혀 있다 (‹Dummy No.29›). 성화의 광배를, 또 동시에 변태한 벌레가 남긴 껍데기를 연상시키는 이미지는 가장 성스러운 것도, 또 기능을 다하고 나면 버려지고마는 흉물스러운 것도 그것을 이름 붙이는 목소리의 얇디 얇은 경계의 양 쪽에 맞닿아 있다는 것을 상기시킨다. 박웅규의 제단은, 통제하려는 것(자아)을 뚫고 나오는 통제 할 수 없는 것(아토포스로의 몸)을 소환하는 길고 괴로운 수행의 흔적이자 가능성과 불가능성을 상호전복시키는 주술로서 공간을 울린다.

 

 

 

Voice without Body

 

Text by Jinho Lim

 

‘I was born with a voice’ is not an agreeable statement as ‘I was born with a vocal cord, lips and a tongue’. Often voice is something to fight for, and history has often witnessed people being deprived of, or relinquishing their voices. As often said, an infant imitates the mother’s voice and orient to the father’s voice to identify useful signs among noises inside out of the body. And perhaps by opting out prohibited desires when one first faces the world outside the guard of the parents, an individual polishes oneself as a master of a refined voice with other noises muted. As a social subject, by sharing experience in a common language, one gets to synchronise its existence to a single voice.

A compulsion to speak in a language that can be rendered into other’s experience simultaneously operates as an apparatus to confine one’s being to the other’s language, as part of the dominant voice that excludes non-norms.¹ And forced by the humanitarian doctrine to become a master of the body, a master of one voice that can embrace all the being’s traces scattered in time and space, we diligently disregard the noises that cannot be registered as meaningful signals (“suppress all impulses that are irrelevant to upgrading your function”). Or, as a part of the big voice that perseveringly verbalises the ineffables, we are mobilised in its project to expand the boundary of the possible (“reflect on the day’s joys, sorrows, regrets to write down in a journal with a scheme for the tomorrow that is not yet here”).²

In fact, nudging us to chat has been the typical strategy of the self proliferating Voice: think of the sexuality that had been forged by the chattery voices in doctor’s offices, counselling offices, and confessional booths, as Foucault analysed. And now by not neglecting any activity, relationship, and flow of energy; the Voice talks about everything in the language of routes, records, transactions, and likes as if it aims to translate all the ineffable from our experiences. We, who eagerly talk about the power of positivity and the autonomous sensory meridian response, is assimilated into the auto-augmenting Voice; to name all the unnamed, to articulate everything about us, and to leave a copy of ourselves in the system.

Thus we are being patternised in an unprecedented pace. We speak of experiences, memories, and relationships that have not gone by way of our bodies: we love, desire, trust, and hope via signals from inside out of the media that catalyse sensations already embedded in our body and memory. And like our mirror images, voices without bodies in the system narrate experiences, memories, and relationships that have no material evidence to root on: as part of the apparatus propagating shame, hate, anxiety, and hope these voices without bodies proliferate statistical faith and power over bodies.³ Perhaps, we must have been trained to articulate clearly and in abundance, so that we can live with these burgeoning voices without bodies, or rather to live as voices without bodies ourselves.

And as a result, it seems that my own trusted voice can now leave my body to indwell somewhere else and pretend my being. A voice does not need a body as its bondsman anymore (think of the humanoid Sophia sharing jokes with reporters in her uncanny human-like skin), and we are anxious of losing our privileged possessory right to the voice, as well as our status as the honourable master of body and mind (remember the TV show in which the memory, taste, and personality of a deceased is restored based on the data he left on the network, so his resurrected voice can live again according to the desire of his widow (Black Mirror season 2 episode 1 Be Right Back).

But, in fact, voice has never indwelled anywhere, ever. Voice has always willed to transcend the given body to inhabit somewhere celestial. I have never been a true master of my voice. It is rather likely that I have always been a dummy sitting on the lap of a ventriloquist forging my speech.⁴ And by addressing the language given, I transcend the limit of my being to become part of the Voice as well. My voice, once believed to be the tremor of my flesh and my will, is always departing my body to be interpreted, recorded, rearranged, forged, and reproduced: to outdwell as a sign. And I, by internalising the Voice once again, live in a fantasy that I will become the master of my body and the world.⁵ Nevertheless, that single coherent voice of mine is always interrupted by this and that noise made by my body and mind. My voice can never fully govern my existence, just as my body has never been a full owner of its own voice.⁶

 

¹ For example, to utter ‘it is a sad house where the hen crows louder than the cock’ does not point at your hen nor his hen, in fact, any single hen. But while being passed down as part of the culture, infinitely replicated; the line became a signifier to a metaphoric norm constraining all the hens in the houses. Standing in front of Jiin Juen’s Folder: jikkbakguri, a series of framed mirrors with proverbs (mostly about women, de-gendered by the artist who substituted the sentences’ subject, women or she, with the pronoun you) engraved on it, a viewer enters into an unusual experience: the distance among my voice uttering the text, my image in the framed mirror, and the the ‘I’ (‘you’) interpellated by the text ceases to exist. And at this moment, it is revealed that the spoken norm, as an opaque metaphor which always slips away from both being true and being false, is nothing but a bare spoken voice.

² Ruth Waters’s video Emotion Over Raisin frames a group meditation session that focuses on concentrating mind to the sensation of the body that is here and now, by corresponding the mind and the body to a single coherent inner voice. However even when rolling, smelling, listening and tasting the raisins that they hold, the group’s meditation doesn’t seem successful with all kinds of voices randomly bringing up stress, success, a cat, Judge Judy, and a potential Instagram post to interrupt their connection to the raisins. The session’s struggle reflects today’s reality in which information about perfect control over our mind and body proliferates. And this reality paradoxically reveals the impossibility of voice being a perfect master of one’s mind and body.

³ Youngzoo IM’s Mood highlights recent phenomenon of the ubiquitous cell broadcast message alerted by the national disaster center. With the piercing siren, the message reduces variety of solid experiences in pouring rain, dusty sky and steaming heat into a flattened affect of anxiety by converging collective memory into a single sign of disaster. 
Likewise, affective signs endemic to soap operas, such as urgent melodies, hectic breaths, throbbing nostrils, and widening pupils, have trained us to react universally without considering particular narratives of any context. These signs of mechanical autonomic nerve reactions are rampant in the media as part of the strategy of the cultural industry that mass-produces consumers who respond accordingly to the system’s inputs.

⁴ Entering the gallery, a viewer faces Sarah Duffy overlooking the entrance, and notices her singing voice filling the space. Her body singing the song with technique of ventriloquism painstakingly distances itself from her own voice. Like an ancient priestess reverberating the transcendent voice of a god, her performance sublimates her voice away from the body into a nonmaterial thing (Come On In). Meanwhile, in the gallery next door, another image of Duffy talks on a stage about memories of freezing, when her body didn’t move according to her will (Graceless). When her voice consistently claims to disassociate itself from the useless, malfunctioning body, her body suddenly stops to lipsync to the voice and walks away from the stage, leaving the voice unattended. The abandoned voice echoes on an empty stage as another kind of ghostly image.

⁵ IM’s video messages arrive abruptly on a wall, to the anonymous addressees. The vague message can be read one way or another, but seems that it doesn’t matter how the message is interpreted (Wa! In the message can be either wa(come) or wa(yahoo) and even plain wa(ah) in Video Message: On Your Opposite Side). The artist’s voice that has once left her mouth does not stick on anything concrete (telling the direction of a spinning sky converges into neither truth nor false in Video Message: WSNE), and flows from a sign to another like a haunted sound (‘One, two, three, two two three’ becomes ‘the first, the second, and the third’ that circles like a merry go round in Video Message: Waltz Time) that indwells in no body.

⁶ A pathological condition that was thought to be unaccountable in terms of the cause of the symptom is now told that the body’s own immune system is the very cause the symptom. In this case, it is inexplicable if the body attacking itself is still considered the self or the enemy to combat against. This body as an atopos is called atopy. Wunggyu Park by representing this pathological scars on the skins of paper with cinnabar pigment, simulates a series of talismans, with ‘body of atopos’ as its medium (Scar No. 1-12). 
And in front of this wall of arcane mandalas, the pathological fetish, lies a dead icon on a casket like a death mask (Dummy No. 29). The image reminds both an empty halo or a shed left behind a molting creature. The icon recalls that the sacred and the horrid is only distinguished by the hair-thin skin of language that names one divine and the other creepy. Park’s altar is a vestige of his painful and tedious performance to summon the ungovernable (the body as atopos) over the will to govern (the voice), as a trembling spell that inverts the possible and the impossib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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