텍스트의 틈, 이미지의 구멍
김홍기
1. 배분
임영주는 배분에 능하다. 그는 아침 일일극을 시청하고, 명상에 잠기고, 갖가지 작업을 진행하고, 저녁 일일극을 시청하는 식으로 일과를 배분하고 실천한다. 버겁지도 않고 헐겁지도 않게 가장 알맞고 천연한 방식으로 일과를 배분하는 솜씨가 꽤나 좋다. 2017년 산수문화에서 열린 그의 개인전 <오메가가 시작되고 있네>에서도 배분의 능숙함은 돋보인다. 이 전시는 외관상 회화와 설치 작업을 내놓은 전시로 보이지만 동시에 그의 여러 비디오 작업이 홈페이지를 통해 정해진 시간표에 맞춰 상영된 이원적 전시이다. 물리적인 전시공간을 회화와 설치에 할애하고 비물리적인 인터넷 공간을 비디오 작업에 할애하는 형식으로, 그는 요령껏 개인전의 출품작들을 배분한다. 제한된 전시공간 안에 회화와 비디오를 전부 욱여넣지도 않고, 그렇다고 전시에 꼭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작품을 쉽사리 내치지도 않는다. 주어진 조건하에서 배분의 묘를 발휘하면 될 일이기 때문이다. 또한 배분의 이유가 단지 전시공간의 물리적 한계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임영주는 자신의 회화가 전시공간에서 관람되길 원하고 자신의 비디오가 관객 각자의 공간에서 관람되길 원한다. 각각의 작품마다 그것이 선보일 수 있는 가장 알맞은 방식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렇듯 임영주는 개인의 일과든 전시의 형태든 주어진 물리적 조건하에서 가장 적절하고 자연스러운 배분의 방식을 추구한다.
작가의 이런 기질은 그가 작업하는 방식에도 그대로 반영된다. 그의 생각은 때로는 회화로, 때로는 서적으로, 때로는 비디오로 자연스럽게 배분된다. 이는 생각의 원류가 임의로 조성한 물길을 따라 구획되는 것이 아니라 유속과 지형의 차이에 따라 자연스럽게 물줄기가 갈라지는 것에 가깝다. 어떤 물줄기는 텍스트의 속성을 띠면서 서적으로 흘러가고 [괴석력], 또 다른 물줄기는 특유의 물성을 갖춘 회화나 설치 작업으로 귀결되고(산수문화에 전시된 작업들), 어떤 물줄기는 시청각적 이미지의 편집을 거쳐 비디오 작업으로 모여든다(웹 상영회의 상영작 목록). 이렇게 자생적으로 갈라진 사유의 물줄기들 사이에 위계는 들어서지 않는다. 이것들은 하나의 원류에서 내뻗은 것이기에 각자 독립성을 유지하면서도 서로가 서로를 반영한다. 예컨대 임영주가 한동안 파고든 동해시의 추암 촛대바위는 개인전에 전시된 여러 회화의 소재로 쓰이고, 그의 서적 [괴석력] 제1장의 소재이기도 하며, <애동>(2015/2018)이나 <극광반사>(2017)와 같은 비디오 작업에서도 거듭 등장한다. 하나의 괴이한 바위가 사유의 물줄기를 따라 다양한 매체로 표현되는 것이다. 이로부터 촛대바위라는 텍스트, 촛대바위라는 회화, 촛대바위라는 비디오가 배분되어 각자 독립성을 유지하면서도 간혹 서로 맞물리기도 하는 것이다.
2. 틈
여러 매체를 유연하게 활용하는 임영주의 작업은 공통적으로 어떤 틈이나 구멍을 마련하는 것에서 비롯된다. 그 틈이나 구멍은 작가의 상상이 시작되는 입구이기도 하고 그것이 종료되는 출구이기도 하다. 이런 특징은 작가가 언어를 활용하는 여러 방법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먼저, 은어에 주목하는 경우가 있다. 작가는 해돋이의 모습을 일컫는 ‘오메가’, 사금을 채취하는 사람들이 사금을 일컫는 ‘요정님’, 청소년들이 말싸움을 끝낼 요량으로 외치는 ‘오로라반사’ 등 특정 집단이 전유한 은어를 통해 단어의 사전적 의미에서 비켜난 자리에서 언어의 틈을 확보한다. 그런가 하면 그의 2016년 개인전 제목 ‘오늘은편서풍이불고개이겠다’의 경우에는 문장 전체를 의도적으로 붙여쓰기함으로써 ‘불고 개이겠다’라는 기상예보의 전형적인 서술어에 ‘불고개’라는 다소 불길한 합성어를 슬쩍 끼워 넣어 언어의 틈을 벌린다. 역시 날씨와 연관된 그의 비디오 작업 <대체로 맑음>(2017)을 보면, ‘기상(氣象)’은 대기 중에서 일어나는 물리적인 현상을 통틀어 이르는 말이지만 작가는 한자어를 곧이곧대로 해석함으로써 과학적인 의미를 비틀어 ‘에너지(氣)의 형상(象)’에 대한 신비적인 이야기를 풀어낼 틈을 만든다. 동음이의어를 사용하는 경우도 있는데, 그의 비디오 작업 <총총>(2017)의 제목은 ‘촘촘하고 많은 별빛이 또렷또렷한 모양(Starry Starry)’이면서 동시에 ‘편지글에서, 끝맺음의 뜻을 나타내는 말(悤悤)’을 뜻한다. ‘총총’의 이런 의미의 차이가 만들어내는 간극 사이로 작가의 우주적인 상상이 펼쳐진다.
이런 구도에서 보면 오늘날의 물리학, 천문학, 기상학 등 과학적 사고에 기반을 둔 언술마저도 그 이면에 비과학적 상상의 가능성을 포함하고 있다. [괴석력]의 첫 페이지는 편서풍을 형상화한 기상도와 함께 초중등 과학 교과서에 등장할 법한 두 개의 명제가 적혀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여러 곳에서 □□이 일어난다. 이것은 지구가 계속하여 활동하고 있다는 하나의 증거이다.” “활동과 □□은 어떻게 일어나며, 이때 일어나는 여러 가지 현상에 대하여 알아보자.” 과학적 사고의 측면에서 보자면 이 명제들의 빈칸은 합리성과 객관성에 근거해 정해진 답을 채워 넣어야 하는 공간이지만, 임영주에게 그것은 과학을 초과한 세계의 신비로 통하는 관문,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구멍과 같다. [괴석력]은 그가 이 구멍에서 수집한, ‘정답’을 초과하는 여러 현상과 자료로 채워져 있다. 이것은 작가의 표현에 따르면 ‘미신’의 영역인데, 기존의 무속 신앙이나 기복 신앙뿐만 아니라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근거가 모호하지만 엄연히 현실에서 작동하는 온갖 종류의 범속한 믿음까지 포함하는 것이다. 돌은 이 보편적인 미신의 영역을 함축한 물체로 제시된다. 촛대바위나 선바위처럼 영험한 힘이 있다고 여겨지는 돌뿐만 아니라 흔하디흔한 돌멩이부터 달과 지구와 같은 천체의 거대한 돌까지 어쩌면 우주의 모든 돌이 괴석일는지도 모른다. 제각각 남다른 모양을 지닌 돌에 대해서 일반적이고 정상적인 모양을 말할 수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임영주에게 괴석력이란 지질학으로 온전히 분석되지 않는 물체의 힘이다. 기하학으로 온전히 작도되지 않는 난반사의 현현이다. 즉 합리적으로 온전히 해명되지 않지만 엄연히 존재하는 ‘미신’의 활력이다.
3. 구멍
‘괴석력’이 발휘될 수 있는 틈이나 구멍에 대한 열정은 위에 언급한 개인전 <오메가가 시작되고 있네>에서 선보인 회화와 설치 작업에서도 여전하다. 예컨대 붉은 해가 솟아오르며 ‘오메가’ 현상이 벌어지는 순간, 또는 촛대바위의 꼭대기에 해가 걸리면서 이른바 ‘해꽂이’가 일어나는 순간이 과학적 합리성을 초과하는 임영주의 회화적 상상이 시작되는 틈이나 구멍으로 기능한다. <밑_문>은 촛대바위를 수직으로 잘라서 좌측과 우측을 두 폭의 캔버스에 나눠 그려 촛대바위 사이로 벌어지는 상상의 틈을 형상화한 작업이다. 전시공간의 한 벽을 27개의 크고 작은 여러 모양의 캔버스로 채운 <밑_오메가 밤 산 물 소리 빔 촛대 물 돌 맑음>은 그 틈 사이로 펼쳐지는 여러 사물과 사건을 형상화한 작업이다. 상서로운 이미지들이 모여 또 다른 커다란 상상의 몽타주로 이어지는 것이다. 다른 한편, 어항이나 수족관을 열심히 꾸미며 이른바 ‘물생활’을 영위하는 사람들이 장식을 위해 바위 모양을 본떠 만드는 ‘백스크린’을 마치 부조처럼 설치한 작업 <물생활_‘눈을 가늘게 뜨고 보거나 한 곳을 보다 보면 그렇게 보입니다.’>는 합리적 세계의 외부로 통하는 틈이나 구멍을 확보하는 또 다른 방법을 제안한다. 그것은 눈을 가늘게 뜨고 보면서 눈꺼풀 자체를 하나의 ‘틈’으로 만들거나 한 곳을 뚫어져라 보면서 그곳을 하나의 ‘구멍’으로 여기는 것이다. 언뜻 싱거워 보이는 얘기지만 온갖 종류의 범속한 믿음의 계기가 이러한 제안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아마도 작가의 일과에 포함된 명상도 이와 유사한 방식으로 시작될 듯싶다.
이런 측면에서 임영주가 원형의 캔버스를 즐겨 쓰는 까닭도 유추해볼 수 있다. 작가는 사각의 캔버스가 주는 안정적인 느낌과 달리 원형의 캔버스가 자아내는 어딘지 모를 불안정하고 불확실한 느낌에 종종 끌린다고 말한다. 만일 과학의 합리적 근거가 제공하는 인식의 안정성을 사각의 캔버스에 비유할 수 있다면, 원형의 캔버스는 합리성의 관점으로 온전히 포섭되지 않은 채 실존하는 믿음의 세계를 담아내는 프레임일 수 있다. 그렇다면 벽에 걸린 원형의 캔버스는 돌출된 회화의 이미지가 아니라 합리성의 외벽에 뚫린 큼지막한 ‘구멍’을 통해 엿보이는 믿음과 정념의 이미지일는지도 모른다. 그러고 보면 그의 비디오 작업에서도 원형의 이미지가 즐겨 사용된다는 사실이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예컨대 <극광반사>의 초반부에는 원형의 이미지가 좌우로 오가는 장면이 보이고, <총총>에는 사각의 스크린에 여러 종류의 원형 이미지들이 삽입되어 있고, <대체로 맑음>에서도 마찬가지로 ‘氣象’이라는 글자를 마치 서치라이트처럼 훑고 지나가는 원형의 이미지를 비롯해 여러 원형의 프레임이 삽입되어 있다. 이런 이미지들 역시 사각의 스크린에 뚫린 동그란 구멍처럼 여겨지는 것이다.
임영주의 비디오 작업 중에서 물리적 세계와 정신적 세계를 잇는 틈이나 구멍의 모티프를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은 <극광반사>이다. 이 작업의 도입부는 이번에도 촛대바위의 이미지에서 시작되는데 작가는 시각효과를 이용해 바위의 이미지를 겹치고 번지게 만들어 상상의 세계로 진입할 틈을 벌린다. 그리고 후반부에는 다소 추상화된 선바위의 이미지를 보여주면서 그 바위틈을 통해 상상의 세계에서 빠져나갈 출구를 마련한다. 이처럼 비디오를 통해 조성된 틈이나 구멍은 강한 인력으로 관객의 시선을 잡아당긴다. 그의 비디오 작업 자체가 어떤 물체의 에너지, 즉 ‘괴석력’을 띠게 된 것이다. 이외에도 <워터/미스트/파이어/오프>, <총총>, <대체로 맑음> 등 임영주가 2017년 제작한 비디오 작업들은, 작가가 직접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타인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제작했던 과거의 비디오 작업들과 달리, 주로 파운드 푸티지와 시각효과만을 사용해 내적인 상상의 세계에 집중한 까닭에 더욱 강한 인력을 띠는 것으로 보인다.
4. 이중나선
2018년 부산비엔날레에 출품한 임영주의 비디오 작업 <객성>은 접촉의 모티프에서 출발한다. 먼저, 분단된 한반도의 두 정상 간의 접촉이 있다. <객성>의 초반부에는 2018년 4월 27일 판문점에서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조우하는 중계방송 이미지가 등장한다. 이때의 접촉은 두 분단국가의 접촉이라는 역사적이고 상징적인 의미를 띠겠지만 또한 두 개인의 접촉이기도 하며 두 신체의 접촉이기도 하다. 임영주는 두 정상이 나란히 걸으며 서로의 손등이 살짝살짝 접하는 화면을 클로즈업한다. 화면의 입자들이 굵어지고 색채들이 흩어지면서 매끈하게 보였던 이미지의 표면이 성글게 벌어지기 시작한다. “점점 가까이 다가갈수록 깨지고 또 깨지는” 계단효과가 발생하여 현실의 이면으로 오르내리는 통로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이윽고 두 정상은 판문점 주변을 산책하다가 ‘도보 다리’의 벤치에 앉아서 30분가량 이야기를 이어 나간다. 보도진이 없는 장소에서 대담이 이루어진 까닭에 방송사는 음소거된 장면을 생중계해야 하는 난제에 직면한다. 작가는 이처럼 사운드의 표면에 뚫린 텅 빈 구멍에 주목한다. 그리고 정상들이 머문 다리의 난간을 이미지의 틈으로 삼아 작가적 상상의 세계로 들어서고 역시 그 난간을 통해 그곳에서 물러난다. 이 작업의 화면 밖 목소리로 임영주는 말한다. “소리, 색, 움직임, 문자, 눈빛, 손짓. 모든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아주 사소한 것이라도 놓치지 말고 주의 깊게 살펴야 합니다.” 상상력이 비집고 들어갈 틈을 찾으려면 역설적이게도 빈틈없는 자세가 요구되는 것이다.
작가의 안내를 받아 입장한 이면의 세계는 초신성의 공간이다. 현실의 세계에서는 두 정상이 접촉하여 화합을 꾀하고, 상상의 세계에서는 두 항성이 접촉하여 초신성의 사건을 일으킨다. 지구에서는 비핵화가 첨예하게 논의되고, 우주에서는 핵융합으로 엄청난 폭발이 발생한다. 이와 같은 의외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중심으로 현실과 상상이 서로 가까워지고 멀어지기를 반복하며 이중나선의 궤도를 그린다. 이때 특히 눈여겨볼 것은 이 비디오 작업 속에서 텍스트가 조합되는 방식이다. 임영주는 남북 정상의 도보다리 회담이 불러일으킨 사운드의 공백을 두 종류의 텍스트로 채운다. 첫 번째 종류는 초신성의 유형에 관한 과학적 언술이다. 이른바 열폭주 현상에 의해 초신성이 발생하는 일련의 과정이 보이스오버로 서술된다. 두 번째 종류는 개별 언어의 모든 자모를 적어도 하나씩 포함한 문장들이다. ‘팬그램’이라고 불리는 이 특수한 문장들은 오늘날 새롭게 출시할 컴퓨터 폰트가 시각적으로 제대로 구현되는지 테스트할 때 주로 사용된다. 한국어, 영어, 러시아어 등 여러 언어의 팬그램들이 음성과 자막으로 <객성>을 채운다. 전자의 텍스트는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유의미한 언술인 반면, 후자의 텍스트는 오로지 조형적인 목적으로만 작문된 무의미한 문장이다.
그런데 임영주의 작업에서 의미와 무의미는 절대적으로 구별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번갈아들며 맞물리는 관계를 맺는다. 초신성에 관한 천문학적 담론은 비직관적인 용어와 서술로 채워진 탓에 단어들의 무질서한 난수표처럼 보이기 일쑤이고, 반대로 각종 언어의 팬그램들은 때때로 암시적이고 아리송해 보이는 까닭에 우회적인 의미를 간직한 메시지처럼 보인다. 남북회담의 맥락까지 고려한다면 텍스트들의 이중나선은 더욱 복잡해진다. 천체의 쌍성에 대한 서술은 한반도 분단국가의 현실에 관한 비유 같기도 하고, 어떤 팬그램들은 양국이 극비리에 소통하기 위해 고안한 암호문인가 싶기도 하다. 이를테면 임영주는 <객성>에서 합리적 인식과 비합리적 상상이 직통하는 ‘핫라인’을 개설한 것이다. 이로써 과학과 신앙, 의미와 무의미, 지식과 억견이 즉각적으로 접촉하고 소통한다. 그 직통의 효과가 발휘되면 천체의 저 엄청난 불빛은 초신성이 되기도 하고 객성이 되기도 한다. 또한 갓 탄생한 별의 울음소리가 되기도 하고 곧 사망할 별의 비명소리가 되기도 한다. 이것은 터무니없는 공상을 내세워 합리성의 가치를 부정하려는 시도가 아니다. 다만 오늘날 우리의 세계를 구성하는 합리성의 빛에 가려진, 그러나 엄연히 존재하는 비합리성의 그림자를 가시화하려는 것이다. 실제로 냉전기 미국과 소련 사이에 개통된 핫라인의 첫 메시지는 무의미한 팬그램이었다(“날쌘 갈색 여우가 게으른 개를 뛰어넘는다.”). 더욱이 핫라인은 고장이나 오류가 발생할 가능성에 대비하여 주기적으로 무의미한 메시지를 교환하며 가동된다(“백두산 하나. 백두산 하나. 여기는 한라산 하나. 감명도?”). 유의미한 전언의 빛을 밝히기 위해서는 무의미한 빈말의 진득한 그림자가 밑에 드리워져야 하는 것이다.
5. 관문
임영주가 서적, 회화, 비디오를 불문하고 확보하는 틈이나 구멍은 일종의 관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곳들은 현실과 상상이 맞닿은 경계이다. 즉 현실이 상상과 어울리는 출구이며 상상이 현실에 뿌리박는 입구인 것이다. 마치 앨리스를 이상한 나라로 이끄는 토끼굴처럼 임영주가 뚫은 관문은 우리를 색다른 감각의 영토로 인도한다. 이런 맥락에서 그의 작업을 체험한다는 것은 어떤 비일상적인 시공간을 모험하는 것에 빗댈 만한데 작가는 종종 그 모험의 안내자 역할을 맡기도 한다. <吉길안내>(2014)는 작가가 몸소 관객을 좋은 길로 안내하는 내용의 퍼포먼스와 비디오로 이뤄진 작업이며, <술술술 아파트>(2014)나 <돌과 요정>(2016) 같은 비디오 작업들은 과학과 미신이 팽팽히 맞선 몇몇 특이한 장소들을 작가가 직접 편력하며 기록한 모험기의 성격을 띤다. 그런가 하면 <총총>과 <워터/미스트/파이어/오프>와 같은 최근의 작업들에서는 각종 지침서에 나올 법한 지시문들이 자막이나 보이스오버로 제시되어 관객의 시청각적 모험을 돕는 길잡이 역할을 한다.
2018년 두산갤러리에서 열린 임영주의 개인전 <물렁뼈와 미끈액>에서 선보인 비디오 작업 <인증샷_푸른 하늘 너와 함께>(2018)는 관문의 안내자 임영주를 명시적으로 보여준다. 느릿느릿 걷는 한 여자의 뒷모습이 스크린 한가운데에 보인다. 그가 등 뒤로 뻗은 오른손을 마주잡은 다른 누군가의 왼손이 화면 아래쪽에 걸쳐 있다. 마치 일인칭시점 비디오게임을 하듯이 관객은 스크린 속 여자의 손에 이끌려 어디론가 인도되는 느낌을 받는다. 본격적인 전시가 시작되는 길목에서 안내자와 조우하게 되는 것이다. 모험의 안내자가 준비한 코스는 현실과 상상의 관문을 이쪽저쪽으로 넘나든다. 평범한 산길이나 지하주차장을 지나는 와중에 밤낮이 바뀌고 계절이 바뀌고 눈비가 내리기도 하고, 어느새 별빛 총총한 우주를 마주하다가 세찬 폭포수를 통과하기도 한다. 임영주는 이처럼 현실과 상상이 은연중에 맞물리는 미로 같은 코스를 만들어내고 그 입구에서 관객의 손을 잡아끈다. 그가 비디오로 작업하는 주된 이유 중 하나는 아마도 그것이 이런 복합적인 코스를 짜는 데 가장 적절한 장치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에게 몽타주는 무엇보다도 현실의 쇼트와 상상의 쇼트가 구분되는 동시에 연결되는 관문을 가설하는 기법일 것이다. 이때 관문의 비유는 관절의 비유로 바꿔도 무방할 것이다. 관문이 영토를 구분하고 연결한다면 관절은 신체를 구분하고 연결하기 때문이다. 작가가 안내하는 모험의 코스가 곡예사의 신체처럼 현실의 세계에서 상상의 세계로 격심하게 꺾이더라도 그 사이의 관절이 잘 작동하는 한에서 우리는 불안해하지 않을 수 있다. 즉 임영주의 비디오 작업에서 발견되는 텍스트의 틈과 이미지의 구멍에 ‘물렁뼈와 미끈액’이 잘 갖춰져 있는지가 중요한 것이다. 그 섬세한 접골의 기술을 일컬어 몽타주라고 한다.
6. 관절
<인증샷_푸른 하늘 너와 함께>를 통과하여 전시장의 가장 깊숙한 장소로 들어서면 임영주의 또 다른 작업 <요석공주>(2018)와 마주하게 된다. 이 3채널 비디오 작업을 재생하는 3대의 스크린은 마치 관절로 연결된 것처럼 각지게 맞물려 있다. 스크린들 간의 분리와 접합을 입체적으로 부각한 것이다. 어떤 때는 3개의 스크린 전체로 뻗은 파노라마적인 이미지가 재생되고, 어떤 때는 스크린별로 현실의 이미지와 상상의 이미지가 배분되어 재생된다. 이런 식으로 스크린의 구부러진 관절은 이질적인 이미지들이 수렴하고 발산하는 수직적인 틈으로 기능한다. 또한 임영주의 작업에서 자주 발견되는 이미지의 구멍, 즉 사각의 스크린에 삽입된 원형의 이미지도 역시 활용되고 있다. 예컨대 폭포의 이미지에 또 다른 원형의 폭포의 이미지가 삽입되어 폭포와 구멍의 동질성이 암시되며, 작업의 마무리는 별빛 가득한 우주의 표면에 뚫린 두 구멍이 점차 하나로 합쳐졌다가 마침내 닫히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그렇다면 이 작업의 틈과 구멍을 감도는 이중나선의 정체는 무엇인가?
<요석공주>는 제목 그대로 요석공주에 관한 작업이다. 그는 7세기 신라의 왕 김춘추의 딸이며, 신라의 고승 원효의 부인, 신라의 학자 설총의 어머니로 알려진 인물이다. [삼국유사]에 짤막하게 기록된 역사적 인물이 작업의 주인공인 것이다. 이처럼 임영주의 이 작업은 그의 전작들과 달리 동시대나 근과거가 아닌 오래된 역사의 기록에서 상상의 물꼬를 트기 시작한다. 그렇지만 그의 전작들과 마찬가지로 과학과 신앙, 합리와 비합리를 나누고 잇는 틈과 구멍에 대한 성찰을 보여준다. 역사의 맥락에서 그것은 정설과 속설의 관계로 요약될 수 있다. 작가가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많은 역사적 인물들 중에 유독 요석공주에 관심을 둔 것은 그가 정설과 속설의 그 어디에도 온전히 속하지 않는, 또는 그 둘 모두에 맞닿은, 달리 말해 정설과 속설의 관절에 해당하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즉 이 작업은 요석공주를 구심점으로 삼아 정설과 속설이 빙글빙글 맴도는 움직임과도 같다. 가운데 스크린에 맺힌 ‘요석’이라는 글자를 중심으로 양쪽 스크린의 요석공주가 리본을 돌리는 이중의 장면은 이 작업의 모티프를 상징적으로 집약하는 구도로 보인다.
요석공주는 이름이 없다. 그의 아버지(김춘추), 그의 남편(원효), 그의 아들(설총)은 모두 이름이 있지만 그는 그저 요석궁에 머무는 공주일 뿐이다. 거처와 신분만 전해질 뿐 정작 이름이 없는 미상의 인물은 그 자체로 틈이나 구멍으로서만 존재한다. 원효가 요석공주와 합방하기 위하여 불렀다는 “그 누가 내게 자루 없는 도끼를 주려는가. 내가 하늘을 떠받칠 기둥을 찍어 보련다.”라는 아리송한 노랫말도 정설과 속설 사이의 블랙홀로 휩쓸려 들어간다. 비유컨대 요석공주는 무언가 소리는 들리지만 그 출처를 특정하기 어려운 징후와 같은 것이다. 의학적 관점에서 그것은 이명(耳鳴)이라고 불리며 일종의 질병으로 여겨진다. 반면 불교적 관점에서 그것은 천이통(天耳通)이라고 불리며 일종의 권능으로 여겨진다. 요석공주는 합리적인 이명의 세계와 비합리적인 천이통의 세계 사이에서 동일한 징후로 존재한다. 또는 두루미라고도 불리고 학이라고도 불리는 오백 원짜리 동전의 동일한 새의 형상으로 존재한다. 그는 이명과 천이통을 잇는 관절이며 두루미와 학이 넘나드는 관문이다.
임영주가 7세기의 인물을 다루는 것이 단지 과거와 역사 그 자체에 대한 관심 때문만은 아니다. 그는 역사의 사실을 고증하고 과거의 진상을 복원하려는 생각이 없다. 작업 속의 원효와 요석공주는 현대적인 옷차림으로 등장하며, 배경도 오늘날의 서울과 그 근방의 모습 그대로다. 원효 역의 배우는 민머리 가발을 쓴 것만으로 고승이 되고, 요석공주 역의 배우는 저고리를 걸친 것만으로 왕의 딸이 된다. 작가의 더 주요한 관심은 요석공주처럼 사실과 풍문의 사이에 존재하는 무명의 인물이 시대를 관통하며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구조에 있다. 이번에도 일종의 안내자로 작업에 등장한 임영주는 옷장의 문을 열어 그 틈을 통해 요석공주의 이야기와 홍콩할매의 이야기를 이어 붙인다. 1980년대 한국에서 유행한 괴담의 주인공인 홍콩할매는 7세기 신라의 요석공주와 마찬가지로 이름이 없는, 작업 속에서는 백발의 쪽찐 머리로만 재현되는 검은 구멍 같은 인물이다. 홍콩으로 여행 가던 어느 할머니가 비행기 사고로 원귀가 되어 3층 높이는 가뿐히 뛸 수 있으며 100미터를 10초 안에 주파한다는 이 괴담은 1983년 소련군에 의해 대한항공 007편이 격추당한 참사와 연관된다. 냉전의 갈등과 비극에 대한 정설과 그것이 야기한 미신적인 불안의 속설이 홍콩할매라는 무명의 인물을 통해 서로 맞물리게 된 것이다. 이처럼 시대를 불문하고 발견되는 역사 서술의 이중성, 즉 합리적 판본과 비합리적 판본의 이중적 구조가 <요석공주>의 3채널 비디오이미지로 예시된다.
임영주의 작업에서 과학이 언제나 미신과 맞물려 있듯이 역사는 어김없이 픽션과 이중나선을 그린다. 역사가 한 사회에 대한 합리적인 인과성을 기록한다면, 픽션은 그 사회에서 작동하는 믿음과 정서의 비합리적인 활력을 반영한다. 이런 두 가지 서사의 방식이 교차하는 곳에 요석공주와 홍콩할매의 이야기가 있다. 그 외에도 <요석공주>에는 이명에 관한 이야기, 비타민C의 복용량에 관한 이야기, 오백 원짜리 동전에 관한 이야기, 북두칠성에 관한 이야기 등 정설과 속설이 맞물린 여러 사례들이 제시된다. 세계의 모든 돌이 과학적 합리성으로 온전히 분석될 수 없는 괴석일 수 있듯이, 세계의 모든 이야기도 역사적 합리성으로 완전히 해명되지 않는 괴담일 수 있다. 역사적 합리성을 초과하는 이야기의 틈과 구멍이 도처에서 발견될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요석공주>에 부제를 붙여야 한다면 가장 유력한 후보는 ‘괴담력’이 되어야 할 것이다.
7. 배분
결국 임영주가 여러 매체를 요령껏 배분해서 선보이는 작업들은 근대과학의 합리적 세계에 자리한 틈이나 구멍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로부터 합리의 세계와 비합리의 세계, 과학의 세계와 미신의 세계, 인식의 세계와 상상의 세계, 정설의 세계와 속설의 세계 사이의 만남을 도모한다. 이는 두 종류의 세계 간의 갈등이나 반목을 조장하려는 것이 아니다. 두 세계는 서로 대립되는 것이 아니라 구분되면서도 연결되는 것이다. 말하자면 임영주는 두 세계의 마디를 만들어낸다. 무릎의 관절이 허벅지와 종아리를 대립시키지 않듯이, 임영주의 작업은 과학과 미신을 대립시키지 않는다. 그는 글리치 효과(glitch effect)를 사용한 이미지로 정신의 세계를 시각화하며, 미항공우주국(NASA)에서 제공한 이미지로 미신의 풍경을 그려내며, 불장난과 야뇨증의 관계에 접근할 때도 꿈풀이의 서사만큼이나 두뇌와 비뇨기 사이의 상호관계에도 관심을 가지며, 청각의 이상 현상을 다룰 때에도 의학의 담론만큼이나 신앙의 교의도 참조한다. 중요한 것은 과학과 신앙의 마디, 또는 정설과 속설의 마디를 적절하고 자연스럽게 나누는 것이다. 말하자면 임영주가 추구하는 틈과 구멍은 ‘물렁뼈와 미끈액’이 잘 갖춰진 관절의 자리인 것이다. 그러므로 역시 배분이 중요한 것이다. 일과의 배분, 전시 방식의 배분, 작업 매체의 배분, 과학과 신앙의 배분, 역사와 픽션의 배분 등 스케일이 다른 모든 종류의 배분이 관건인 것이다. 임영주는 배분에 능하다.
김홍기는 서울대 미술사학과 학사와 동 대학원 철학과 석사를 졸업하고 프랑스 파리 3대학교 미학박사를 수료했다. 제5회 ‘플랫폼 문화비평상’ 미술평론 부분에 당선되었으며, 현재 미술비평과 번역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번역서로는 로잘린드 크라우스, 할 포스터 외의 『1900넌 이후의 미술사』(공역, 2016, 3판)와 조르주 디디-위베르만의 『반딧불의 잔존: 이미지의 정치학』(2012)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