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조오억개의 암묵지[暗默知]
임영주, <물렁뼈와 미끈액>2018.8.22~9.19. 두산갤러리
송고은(아트스페이스 보안 큐레이터)
세계는 수많은 암묵지가 떠받들고 있는 것일지 모른다. 임영주의 개인전 <물렁뼈와 미끈액>을 보고 생각했다. 암묵지는 영국의 철학자이자 물리화학자인 마이클 폴라니(Michael Polanyi)가 구분한 지식의 한 종류다. 문서화되어 표출되는 명시지(明示知, Explicit Knowledge)와 상반되는 개념으로, 경험을 통해 개인에게 체화되어 있지만 언어나 문자로 표현하기 어려운 –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지식을 말한다. 폴라니는 인간 행동의 기초가 이를 바탕으로 출발한다고 주장하며 암묵지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이런 관점에서 임영주의 개인전 <물렁뼈와 미끈액>은 데이터화 되지 못한 지식, 즉 사회의 정서와 법칙 아래 자리한 암묵적 지식을 통해 세계를 그리고 있다. 하지만 여기서 암묵지를 단순히 특정한 목적을 위한 노하우로 해석한다면 작품이 포착하는 지식은 그런 목적성을 갖기에는 한없이 가볍기만 하다. 작가가 나열한 정보는 사회의 표면을 떠다니는 너무나 사소한 것 같은, 심지어 쓸데없어 보이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히려 이런 표면적 층위에서 채집된 이미지와 정보들이 오늘을 가장 투명하고 직관적으로 반영하는 것이라면 이러한 소재의 선택은 꽤 적절한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구축된 작가의 논리와 정보의 네트워크는 영상과 회화 작업을 통해 비구축적 조합을 구성하며 진실과 속설을 뒤섞는다.
바라보는 것의 실상
전시장 초입 윈도우 갤러리의 커다란 표면에 언뜻 비치는 바깥 풍경, 그 안쪽에 폭이 좁은 캔버스 7개가 놓여 있다. 전시의 제목과 동명인 회화작품 <밑_물렁뼈와 미끈액>(2017)이다. 서문에 따르면, 임영주는 과학책에서 “뼈와 뼈가 연결된 곳에는 물렁뼈와 미끈액이 들어있다.” 라는 문장을 보고 동해에 있는 촛대바위의 풍경과 딱 들어맞는 느낌을 받았다고 한다. 사고에 점프력을 요하는 작가의 은유를 따라가려면 조금 더 섬세한 관찰이 필요해 보인다. 7개의 캔버스는 촛대바위풍경과 무릎을 묘사한 작품이 3개씩 짝을 이뤄 배열되었다. 중앙에 배치된 캔버스는 광물의 형질을 묘사한 추상적 이미지로써 두 개의 각기 다른 풍경을 잇는다. 이렇게 보니 촛대바위의 돌기들이 무릎의 슬개골을 닮은 듯하다. 하지만 작가의 은유는 그저 표면의 질감 외에 사물사이에 일어나는 화학적 낌새로부터 또 다른 연상들을 발화하는 시킨다. 이러한 표현과 논리의 흐름은 전시 전반에 흐르고 있다. 임영주의 바라보기는 물질을 환경에서 분리해 길들이고 측정하기보다 그것이 처한 내막이나 속사정에 주목하는 것으로 보인다. 작가의 작품은 과학적 사실과 직접적 관계를 맺고 있지 않지만, 그녀가 여러 과학적 법칙을 살피는 것은 결국 과학이란 자연의 개념을 다루는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자연의 원소인 물, 불, 흙, 바람 등은 임영주의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요소이다. 하지만 작가는 합리적 과학 법칙 그 자체 보다 물렁뼈나 미끈액처럼 촉감을 주는 것, 단단함 사이의 추상적 형태와 질감을 가진 것에 더 주목한다.
전시장 내부로 통하는 문을 열자 긴 복도가 펼쳐진다. 그 끝에 <인증샷_푸른하늘 너와 함께>(2018)가 상영되고 있다. 여기서 이 영상 이미지의 출처가 ‘2013년, 한 커플이 세계 곳곳을 여행하면서 여자친구가 남자친구를 이끄는 듯한 모습으로 큰 화제가 된 이미지’라고 밝히는 것은 사실 불필요해 보인다. 그럼에도 이를 언급하는 것은 앞으로 생략되어 설명될 작품에 등장하는 다양한 종류의 ‘가난한 이미지’(poor image)와 비논리의 논리적 구조의 단면을 대표하기 때문이다. 이렇듯 작가는 어디선가 봤지만 잘 기억나지 않는 것, 그것이 당신의 뇌 한 구석을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이 스스로를 어이없게 하는 것들을 바탕으로 한다. 특히, <인증샷_푸른 하늘 너와 함께>는 작가가 일반적으로 참조하는 이미지의 특성 외에 두드러지는 또 다른 특징인 일대일의 호흡을 보여준다. 작가는 종종 작품의 서두에 관객을 개별적으로 한 명씩 자신의 세계로 이끄는 것 같은 행위를 연출한다. 마치 자신을 통해서만 이 세계를 만날 수 있다는 듯, 작가는 불특정 다수의 관객을 직접 맞이한다. 영상 속 (작가자신으로 추정되는) 인물은 일상과 비일상의 경계를 옮겨 다닌다. 하지만 역시 인간의 것이라고 하기에는 낯선 무중력의 걸음걸이는 그 뒤를 조용히 따라 나서는 것을 어딘지 모르게 꺼려지게 만든다. 그 사이 곁눈질로 본 지점에 익숙한 풍경이 있다. 다시, 촛대바위다!
2015년부터 작가가 여러 형태로 천착하고 있는 촛대바위 영상은 이번 전시에서 <애동>(2018)으로 새롭게 구성되었다. 작품은 한 지점에서 확대와 축소 촬영을 반복한 단순한 구조를 지녔다. 대상을 고립시킨 촬영 기법은 워홀의 초기영화 <엠파이어>(Empire, 1964)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촛대 바위는 화면 안에서 조형적 우상(plastic-idol)이 된다. 워홀이 높이 솟아 있는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을 향해 ‘그것은 스타다!’, ‘8시간의 발기!’ 라고 표현하며 대상에 대한 전유를 드러낸 것처럼 <애동>의 촛대바위 역시 관음의 대상이 된 듯하다. 밤 마다 공영방송 종료를 알리는 애국가 영상 첫 장면에 등장하며 유명해진 이 바위의 모습은 섬세한 감정선 없이 응시된다. 작가는 촛대바위를 찍은 영상이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시각적 양식과 소비의 패턴이 야동의 그것과 닮아 있다고 말한다. 여기서 차이를 보이는 것은 해의 높이에 따라 달라지는 빛의 색과 밝기 그리고 ‘동해~물과’를 다양한 방식으로 편집한 사운드다. 영상은 약 3분가량으로 편집된 각각의 에피소드를 시간의 흐름에 따라 순차적으로 재생한다.
복도를 지나 어두운 밤에 안착한다. 코너의 안쪽에는 세 부분으로 분절되어 굽어 있는 벽과 평평한 면이 서로 마주하고 있다. 각 벽면에는 회화 작품 <밑>(2016-2018)연작이 배치되었다. 제목 ‘밑’이 주는 뉘앙스처럼 작품 속 공간은 음습하고 축축한 시.공간을 표현한다. 각각의 회화 작품은 개별성을 갖지만 동양의 병풍에서 보이는 것과 유사한 모티프의 연속성을 띄고 있다. 이것은 작가가 은유한 물렁뼈와 미끈액의 물질들이 생성되는 깊숙한 지층의 풍경 같은 것일 수 있다고 상상해 본다. 지평선이 불분명한 검은 회화는 어두운 숲 속의 풍경처럼 혹은 SF소설에 등장하는 또 다른 차원의 공간처럼 표현된다. 한편, 회화 작품과 함께 놓인 영상 <총총>(2017)은 이러한 우주적 상상의 세계로 나아가기 위한 또 다른 토대를 마련해준다.
보지 못하는 것의 증거
굽은 벽면 안쪽에는 3채널로 상영되는 신작 <요석공주>가 상영된다. 영상의 기본 스토리는 원효대사와 요석공주의 러브스토리로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를 근간으로 한다. 현대에 환생한 원효대사와 요석공주로 보이는 남자와 여자가 이야기를 이끈다. 두 사람은 밤의 숲속과 도심을 평행선의 구조로 헤메이다 결국 서로를 만나 ‘계율을 범하는’ 이야기의 구조를 만든다. 그러나 이 서사 위에 파편적으로 등장하는 이미지와 갖가지 사건은 극의 흐름을 따라가려는 관객을 방해하는 것 같다. 서사 위에 펼쳐지는 파편적 이미지와 사건은 마치 할 일이 태산처럼 쌓여 있는데도 뒤죽박죽으로 섞인 의식의 흐름을 좇아 온라인상의 온갖 기사와 영상을 찾아보는 자의 뇌 구조와 닮아 있다. 작품 속에서 이러한 흐름의 한 부분을 묘사한다면 다음과 같다. 모래바람이부는 사막의 이미지와 함께 ‘바람소리, 물소리, (...) 산천초목소리, 공기소리’를 ASMR 방식의 내레이션 하는 목소리가 들린다. 이후, 세상을 떠난 유명한 한국인 디자이너의 목소리가 불현듯 재생된다. 자신이 디자인한 바지의 ‘풀 먹인 소리’에 전 세계 사람이 놀라워한다는 인터뷰다. 연이어 그 놀라움의 주인공으로 여겨지는 세계인, 즉 마이클 잭슨의 공연 영상이 사막의 배경 위에 분절된 이미지로 중첩된다. <요석공주>는 마땅히 기대되는 서사적 구조와 파편화된 사건을 오간다. 등장인물 요석공주와 원효대사 역시 이러한 구조 사이에서 분절적 행동을 보이기는 마찬가지다. ‘현대판 요석공주’는사이비 종교로 의심되는 형태의 기묘한 제의를 위해 한복 저고리만 입은 채 절을 올리고, 커다란 깨달음을 얻은 듯한 ‘돌아온 원효대사’는 폭포수를 맞으며 득도의 기쁨을 표현한다. 하지만 곧 이를 바라보는 등산객의 시니컬한 시선이 영상의 스토리를 진지하게 따라가던 관객의 믿음을 져버린다. 이렇듯 작품은 현실과 허구, 일상과 비일상의 이중성 안에서 펼쳐지는 헛발질과 같은 행위를 포착한다. 우리의 사고 바깥에 있다고 믿는 이미지와 사건의 불분명한 출처들을 파헤치는 것이다. 이를 통해, 전시 전반에서 발견되는 구조와 서사는 세계를 구성하는 감춰진 회로의 단면을 마주하게 한다.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 지 알 수 없는 안면근육의 판단 불능 상태를 만들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