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과 회화
김시습
나는 아름답다
오 인간이여!
돌의 꿈처럼
보들레르, <아름다움>, 『악의 꽃』
산수문화에서 열린 임영주의 개인전 《오메가가 시작되고 있네》는 크게 돌과 회화를 각각의 두 축으로 하여 구성된 전시이다. 사방의 벽면을 다수의 그림이 채우고 있는 한편으로, 전시장의 한 쪽과 윈도우 갤러리를 이른바 “백스크린”이라 불리는 플라스틱 재질의 인공 바위가 차지하고 있었다. 이는 주로 개인 수족관에 들어가는 모형 바위로 전문 제작자가 제작한 매우 고가의 상품이라고 한다. 임영주의 작업에 관심을 가지고 한동안 지켜봐온 사람이라면 여기서 돌이라는 소재가 낯설지는 않을 것이다. 돌은 최근 몇 년 동안 작가가 자기 작업의 주된 모티프로서 다루어온 대상이었으니 말이다. 여기서 새로운 것은 이 돌이 회화와 함께, 그리고 회화를 통해서 탐구되고 있다는 점이었다.
깜깜하고 조각난 화면
그런데 이 전시가 회화에 대한 어떤 통찰을 제시한다면, 그것은 어딘가 비관적인 것에 가깝게 느껴졌다. 전시장에 처음 들어섰을 때, 나의 시야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한 쪽 벽면을 가득 채우고 있는 깜깜한 화면의 회화 조각들이었다. 최대 20호를 넘지 않는 캔버스에 그려진 대략 스무 점이 조금 넘는 어두운 그림들이 눈에 띄는 질서 없이 산포되어 벽면의 상하좌우를 메우고 있었다. 매우 가까이 다가가서 개별 작품을 하나씩 살펴보기 이전에는 화폭 안에 담겨 있는 것이 무엇인지조차 잘 가늠이 되지 않았다. 그 모습이 나에게는 마치 하나의 커다란 검은색 그림이 외부의 큰 충격을 받아서 산산이 조각나 흩어진 풍경처럼 보였다.
나는 임영주가 회화의 표면과 바탕을 통해 제시한 이와 같은 풍경이 어쩌면 현재 회화라는 매체 자체가 처해있는 역사적 상황에 대한 알레고리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 스펙터클하고 자극적인 이미지들이 일상에서 시각을 사로잡는 오늘날과 같은 시대에 캔버스와 물감이라는 물리적 지지체는 이제 거추장스러운 것이거나 물신적 혹은 퇴행적 집착의 대상에 불과한 것이 되어버렸는지도 모른다. 작가가 의도했든 하지 않았든 간에, 나에게 이 풍경은 더 이상 자신의 이면을 비추는 투명한 창으로 기능하지 못하는, 혹은 더 이상 그렇게 기능한다고 사람들에게 믿어지지 않는, 그리하여 이제 마치 돌처럼 굳어버린 회화의 모습을 우화적으로 풀어놓은 장면으로 보였다.
회화의 역사적 상황에 대한 알레고리는 <물생활_‘눈을 가늘게 뜨고 보거나 한 곳을 보다 보면 그렇게 보입니다.’>(2017)에서도 읽혔다. 산수문화의 윈도우 갤러리에는 마치 모노크롬 회화를 흉내 내듯 네모난 “백스크린”이 매달려 있고, 그 아래로 제목의 일부이기도 한 이런 문구가 적혀 있었다. “눈을 가늘게 뜨고 보거나 한 곳을 보다 보면 그렇게 보입니다.” 나는 한 동안 윈도우 갤러리를 바라보면서 이 말의 의미에 대해 곱씹어 보았다. “그렇게” 보인다는 것은 아마도 믿고 싶은 대로 보인다는 뜻일 것이다. 따라서 이 그림을 모노크롬 회화의 패러디로 보는 것이 정당하다면, “그렇게”라는 부사의 자리에 “회화처럼”이라는 말을 대신 넣어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그 전제가 나에게는 조금 슬프게 들렸다. 눈을 가늘게 뜨고 보거나 한 곳을 보다 보면 이 작품이 모노크롬 회화와 같이 보인다는 말은 그런 방식으로 보지 않으면 결코 이 작품은 회화가 아닌 돌로 보일 수밖에 없음을 역설적으로 지시하고 있는 것으로 여겨졌다.
회화의 가능성을 믿는 누군가에게는 이러한 논의가 지나치게 암울하고 논쟁적으로 여겨질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이번 전시작 외에도 임영주의 작업 세계에는 실로 이러한 비관주의가 스며있으며 그것이야말로 그의 작품을 힘 있게 만드는 요소라고 생각한다. 임영주는 최근 대략 4~5년 동안 다양한 종류의 통속적인 믿음을 작업의 주제로 다뤄왔다. 예를 들어 그는 풍수지리를 믿는 사람들이나 운석과 사금을 찾아다니는 동호회 사람들과 같이 어떤 믿음을 가진 사람들과 그 믿음의 대상을 작품의 소재로 삼아 작업해왔다. 그런데 그가 좇는 것이 주로 이러한 소박한 믿음이라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임영주는 이처럼 작고 확신 없는 믿음과 그 믿음의 구조를 탐구한다. 그리고 확신 없는 믿음은 역설적으로 믿음 자체보다도 믿음의 반대편, 곧 불신을 더욱 크게 비추는 경향이 있다. 우리가 의지할 것이 고작 이런 작은 믿음에 불과하다면 그것은 반대로 세상에 믿을만한 구석이 별로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 아니겠는가?
끼어드는 이미지
파국에서 시작하는 까닭에 이 전시는 회화라는 매체 자체가 가진 가능성을 타진하기보다는, 거기에 끼어드는 이질적이고 다양한 매체의 개입을 포용하는 전략을 택하는 것처럼 보였다. 무엇보다 이 전시는 전시 기간에 맞춰서 개최된 <웹 상영회>와 함께 진행되었다. 오전 10시부터 자정까지 정해진 스케줄에 맞춰 오직 웹에서만 진행되었던 이 상영회에서 작가는 자신이 지금까지 제작한 거의 모든 영상 작업을 선보였다. 이는 전시와 간접적으로 연동되면서 전시에 대한 흥미로운 참조점들을 만들어냈다.
하지만 상영회를 별개로 보더라도 전시에는 영상이나 사진이 개입되어 있었다. 이는 작가가 영상이나 사진 작품을 전시장에 전시했다는 뜻이 아니다. 임영주의 그림 자체가 이미 사진이나 영상의 시선을 차용하고 있었음을 말하려는 것이다. 전시작의 다수는 동해 추암의 촛대바위를 그리거나 이와 연관된 그림이었는데, 작가는 붓과 물감을 활용하여 이 바위를 그림으로 옮겼음에도 불구하고 여기에는 여전히 사진과 영상이 재현하는 촛대바위의 이미지가 끼여 있었다.
여기서 우리는 촛대바위라 명명되는 대상 자체가 실은 관광객들이 들이대는 카메라의 응시를 통해서 발견된 것이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름처럼 촛대와 같이 뾰족하게 솟아오른 모양으로 생긴 이 바위는 TV에 나오는 애국가 첫 소절의 배경화면으로 사용되면서 언젠가부터 동해의 랜드마크가 된 바위이다. 이른바 “해꽂이”라 불리는 키치적 이미지를 재현한 그림인 <밑_오메가 해꽂이>(2017)에는 이러한 관광객의 응시가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해꽂이"는 촛대바위의 꼭대기에 해가 겹쳐지도록 각도를 맞춰서 사진을 촬영하는 행위와 그 구도 및 이미지를 관광객들이 일컫는 말이라고 한다. 임영주는 관광객의 기념 앨범에서나 볼 법한 이러한 "해꽂이" 이미지를 4호 남짓의 작은 그림으로 옮겨 그렸다.
그러고 보면 ≪오메가가 시작되고 있네≫라는 전시의 제목 또한 이러한 키치적 시선을 전제로 붙여진 것이다. 이는 어떤 자기계발서에서 차용한 것으로, 일출이 시작되는 상황을 저자가 과장되게 묘사하는 문구라고 한다. 오메가(Ω)는 그리스 자모의 맨 마지막 글자이면서, 아마추어 사진가나 기자들이 맑은 날 동해에 해가 떠오르는 모양을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다. 그들은 오메가라는 문자와 일출이 가진 형태의 유사성에 착안하여 “오메가 일출”, “오메가 현상”이라는 말을 자주 사용한다고 한다.
《오메가가 시작되고 있네》전은 크게 보았을 때, 전시 자체가 대중문화의 반복 강박을 흉내 내거나 혹은 그 강박 안에 사로잡혀 있는 것처럼 보였다. 파편화된 수십 개의 회화 조각은 수십 번의 매혹과 사로잡힘을 의미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현재 안산의 창작 레지던시에 입주해 있는 임영주는 실제로도 작업을 위해 반복적인 생활의 루틴에 빠져들었다고 한다. 그는 매일 아침에 일어나 차를 한 잔 마시고 그림을 그렸다. 드라마를 한 편 본 후에.
그 사로잡힘은 어떤 각도에서 보면 성적인 것으로 느껴지기도 했다. 전시장 곳곳에 촛대바위나 물기둥을 묘사한 그림들은 남성의 성기를 연상시켰으며, 협곡이나 돌의 움푹 들어간 표면을 그린 그림의 경우에는 여성의 성기를 떠올리게 했다. 모든 회화 작품 제목의 앞에 강박적으로 느껴질 만큼 일관되게 붙은 “밑”이라는 말 역시 성적인 은유로 받아들여졌다. 같은 크기의 직사각형 캔버스 7개에 그려진 시리즈 작품인 <밑_물렁뼈와 미끈액>(2017)의 경우에는 마치 남근 모양을 가진 여러 종류의 대상을 카메라로 더듬는 시선을 나열하여 캔버스에 옮겨 그린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인간아!
프로이트(Sigmund Freud)가 신원 보호를 위해 늑대인간이라 불렀던 한 노이로제 환자는 유아기에 부모가 성교하는 장면을 목격한 이후, 꿈에서 갑자기 창문이 열리면서 창문 밖 호두나무 가지들 위에 하얀 늑대들이 앉아 자신을 내려다보는 것을 보게 된다. 이에 대해 로잘린드 크라우스(Rosalind Krauss)는 창문이 열리자 그 너머로 일어난 무언가가 바로 늑대인간이 자신의 남은 여생 동안 사로잡혀 있게 될 장면의 모체 형상(matrix figure)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적었다.
임영주의 회화를 이해하기 위해 모체 형상이라는 어려운 개념을 전부 이해할 필요는 없다. 다만 이러한 생각에 비춰볼 때 분명한 것은 전시 속 임영주의 그림이 작가 개인의 독창적인 표현의 결과물이기보다는 그러한 환상을 통해 생성된 강박증의 증상이거나 혹은 그러한 강박증을 드러내는 기호라는 사실이다. 이 전시에서 창문은 회화의 프레임 안쪽으로 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회화가 창문 밖으로 보이는 대상이다. 캔버스에 매혹된 임영주는 수십 번의 탐구를 한 다음, 창문을 연다.
가장 멀리서 본 풍경은 가장 가까이에서 본 풍경과 만난다. 이 전시가 돌에 대한, 그리고 돌과 같이 굳어버린 회화라는 매체에 대한 전시였다면, 나는 그것을 보게 만든 주체가 임영주라는 작가이기 이전에 돌 자체였다고 말해보고 싶다. 전시장의 한쪽 구석에 숨겨져 있는 단어 하나가 돌의 시선을 드러내는 단서로 보였다. 그림의 받침대로 사용되고 있는 매우 작고 검은 돌멩이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인간아!” 이 글의 서두에 제시한 보들레르의 시는 조각상의 관점에서 그 조각상이 인간에게 하는 말을 시인이 기술한 것이다. 예술가 개인의 독창적 표현에 의해 현실을 넘어선 이상적 “아름다움”의 대상으로서 제작된 조각 작품이 인간에게 자신은 “돌의 꿈”에 불과하다고 말을 건다. 임영주가 제시하는 돌, 그리고 돌과 같은 회화는 보들레르의 조각상과 같이 자신을 만든 인간인 우리를 매혹하여 불러 세운다. 그리고 마치 우리의 비어 있는 속을 폭로하듯이 거울상인 자신의 텅 빈 몸을 드러내 심드렁히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김시습은 대학에서는 회화를 전공했으나 손은 느리고 생각만 많은 천성을 확인하고는 대학원은 미술이론과로 진학하여 「조선미술전람회의 그림에 나타나는 어린이 이미지 연구」로 학위를 받았다. 독립기획자로 활동하면서 2010년 <옆-사람>과 <두고 온 것들>, 2014년 <청춘과 잉여> 등의 전시를 기획했다. 2016년에는 양주시립장욱진미술관에서 레지던시 매니저로 일했으며, 현재 동시대 미술 및 시각문화에 대한 관심을 갖고 기획자와 글쟁이로서 활동하고 있다.